독일 나치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와 같이 전범기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하켄크로이츠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종전 이후 잠시 동안만 사용되지 않았을 뿐 1952년 해상자위대와 육상자위대를 창설하면서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해상자위대는 군국주의의 깃발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육상자위대의 깃발은 줄기 수만 8줄기로 바뀌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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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August, 2016
15 August, 2016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가
읽어야 할 내용 같습니다.
"마지막 조선 총 독 아베 노부유키의 소름끼쳤던 예언"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
그의 친손자가 현재 일본의 아베 총리이다.
1879년 일본 이시카화 현(石川縣)에서 태어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1944년 7월 24일에 일본의 제9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마지막 시기 조선총독을 지냈던 사람이다.
그는 189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육군참모본부 총무부장·군무국장을 거쳐
1929년엔 육군차관에 임명된다.
1939년에 일본의 제 36대 수상이 되었지만
4개월여 만에 총사퇴하였다.
이후 여러 직을 거치다가 1944년 제 10대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취임하여 전쟁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착취해 갔다.
조선총독으로 부임 후 전쟁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징용및 근로보국대의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리기도 했다.
이 자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대한민국을 뜨게 되는데, 그 때 이 자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한 번 보도록 하자.
日本は敗れたが、朝鮮が勝利したわけではない。
大言壮語ハゴンデ朝鮮が第我に返ってきらびやかで偉大な昔の朝鮮の栄光を取り戻すには、100年という歳月がはるかにかかるだろう。
私たち日本は、朝鮮国民に銃と大砲よりも恐ろしいの植民地教育を植えて置いた。
結局、朝鮮人たちはお互いに仲違いし、奴隷的な生活を送るのだ。
見よ!実に朝鮮は偉大した絢爛だったが、現在の朝鮮は結局日本の植民地教育の奴隷に転落した。
そして、私の阿部は再度もどって来る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읽어야 할 내용 같습니다.
"마지막 조선 총 독 아베 노부유키의 소름끼쳤던 예언"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
그의 친손자가 현재 일본의 아베 총리이다.
1879년 일본 이시카화 현(石川縣)에서 태어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1944년 7월 24일에 일본의 제9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마지막 시기 조선총독을 지냈던 사람이다.
그는 189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육군참모본부 총무부장·군무국장을 거쳐
1929년엔 육군차관에 임명된다.
1939년에 일본의 제 36대 수상이 되었지만
4개월여 만에 총사퇴하였다.
이후 여러 직을 거치다가 1944년 제 10대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취임하여 전쟁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착취해 갔다.
조선총독으로 부임 후 전쟁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징용및 근로보국대의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리기도 했다.
이 자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대한민국을 뜨게 되는데, 그 때 이 자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한 번 보도록 하자.
日本は敗れたが、朝鮮が勝利したわけではない。
大言壮語ハゴンデ朝鮮が第我に返ってきらびやかで偉大な昔の朝鮮の栄光を取り戻すには、100年という歳月がはるかにかかるだろう。
私たち日本は、朝鮮国民に銃と大砲よりも恐ろしいの植民地教育を植えて置いた。
結局、朝鮮人たちはお互いに仲違いし、奴隷的な生活を送るのだ。
見よ!実に朝鮮は偉大した絢爛だったが、現在の朝鮮は結局日本の植民地教育の奴隷に転落した。
そして、私の阿部は再度もどって来る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08 August, 2016
대한민국 만세!! 3/1절과 유관순 열사
대한민국 만세!!
한번쯤 우리역사... 생각해봐요..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중권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흥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작은아버지는 감리교회에서 일요일에만 교회에 올 수 있는 선교사들을 도와서 평일에 교회일을 맡아보는 분이었습니다
공주에서 전도하던 감리교 선교사 사 부인(미국이름 엘리스 샤프)의 권유로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보통과를 졸업한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샤프 부인은 집안 사정이 어려운 유관순을 배려하여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프라이 교장이 3.1운동 참여를 만류했으나, 학교 담을 넘어가서 3.1운동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으며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였으며, 일본 헌병대는 유관순의 부모를 죽이고 유관순을 체포하여 검사국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선고 되었습니다. 다시 경성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으며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으며. 당시 서대문감옥에서는 고문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화학당 교사들의 항의로 시신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 되었습니다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본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골이 없어졌기 때문에,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1947년 조직됨)에서 1989년 10월 12일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였습니다
참고사항
유관순(柳寬順, 1902년 음력 11월 17일/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제국의 모진 고문으로 18세 때 순국하였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으며,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생애
http://ko.m.wikipedia.org/wiki/%EC%9C%A0%EA%B4%80%EC%88%9C
일제만행의 현장
http://m.blog.daum.net/leej7375/16128209?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leej7375%2F16128209
유관순 열사의 행적
http://m.blog.daum.net/wonbbie/8747997?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wonbbie%2F8747997
21 February, 2016
* 우리 영토 대마도를 찾자 *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
대마도-한국영토 거론이 두려운 일본
일본이 또 다시 독도 시비를 걸고 있다.
일본도 독도는 역사적으로 신라때 이사부 장군이 점령접수했고,
일본 메이지(明治)때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에서도
일본영토가 아님을 인정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저들이 왜 이렇듯 시비를 멈추지 않을까!
이유가 있다.
대마도(對馬島)-한국영토 거론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작전이다.
'對馬島本是我國之地'(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다.)
이는 세종대왕이 선언한 것을 실록이 기록하고있는 글귀다.
대마도(對馬島)는 명백히 우리영토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50km,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138km이다.
이 대마도에 고대부터 한국인이 건너가 살았다.
(魏志) 고대 馬韓(마한)과 마주보는 땅이라 하여 우리 선조는「對馬島」로 명명하였다.
세종대왕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의 왜구를 토벌하고 확실하게 한국령(경상도)에 예속시켰다....
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
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이 글귀는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 있는 글귀다.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고 우리 민족의 한쪽다리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그 對馬島를 자기들 멋대로 자기영토로 편입 시켜버렸다.
우리는 일본이 잘라간 그 한쪽발(嶺南之趾)을 되찾아야 한다.
일본은 임진왜란→스페인, 영국 등 서구근대와 세력의 해양영토 약탈시기→식민지 시기 등 연이은
불행한 소용돌이를 이용해 대마도를 슬그머니 도둑질 한 후 (1871년에 일방적으로 이스하라현으로 그 후 1876년에는 나가시키현에 편입)아예
자기들 영토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조정(한국)은 어떤 형태가 되었던 일본에 대마도를 넘겨준 일이 없다.
도둑질한 대마도를 두고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한국인뿐 아니라 그들(후손) 자신도 세뇌했다.
우리는 그 쇠뇌작전과 특히 조작된 일제 식민사관에 젖어 지금까지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건국)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불과 사흘 후(8월 18일) 「역사의 진실은 어쩔 수 없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므로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천명했다.
6.25직전(3년 동안)까지 60여차례나 요구했다.
일본은 역사학회•고고학회 등으로 하여금 대마도에 관하여 왜곡-논문을 발표케 하면서 변명했다.
「쓰시마의 역사적 위치(1949)」,
「대마 문제(1951)」 논문 등이 그 예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미•소가 대립하자 일본은 「이때다」하고 미국에 읍소로비를 했고 미국은 마침내 한국을 배제한채 일본과 다음과 같이 전후(戰後)처리 (샌프란시스코협정)를 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도서는 한국에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에서 미국은 독도와 대마도에 대해서는 영토속국을 명백히 하지 않은 것이다.
아! 6.25가 대마도 반환 걸림돌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고 우선 평화선 선포를 통해 우선 독도만은 어족(魚族)보호 명분을 들어 독도만은 실효지배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지난 2005년에 확인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이승만은 대마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치,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여기에서 「specifically renounce」귀절에 주시해야 한다.
이는 외교문서로서는 최고로 강력한 의사표시다.
대마도 회복(반환) 문제는 우리 7,000만 민족의 숙제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회복하는 문제에 있어 국제관례의 관점에서 아무런 제약이 없다.
왜냐하면 1862년에 미국의 영토가 된 일본 남부 오가사와라(小笠原) 군도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일본 영토로서 인정받고 반환 받았던 국제적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내놓은 지도 ‘삼국접양지도’(하야시시헤이
(林子平) 제작, 프랑스어판)가 그 근거이다.
미국이 오가사와라 군도가 일본 영토임이 옳다고 판단하게 한 그 지도에 오가사와라가 일본 영토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엄연히 한국 영토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이에 준하는 증거가 또 발굴되었다.
지리학자로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이태리인
J.H.Kernot씨가 1790년에 작성한 「일본과 한국」이라는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뿐만 아니고 대마도도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는 사실이 발굴(견)된 것이다.
이 지도에는 대마도가“STRAIT OF COREA'로 표시되어 있고 특히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의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지도 바탕 색깔을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으로 나타내 이들 섬이 한국령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일련의 사실이 부각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독도 시비를 계속하며 분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속셈이 가증스럽다.
독도시비에 말려들고 「對馬島本是我國之地」 세종대왕이 선언한 이 확실한 증거를 두고도 우리는 대마도는 일본 땅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약소국이 아니다.
적어도 자기것은 자기것이라고 당당하게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권에선 나 몰라라 하는 형국이니,
우리 네티즌 들이라도 이글을 여러 카페로 올려 여론을 형성하고,
독도를 떠나서 대마도 반환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게하는 초석이 되고자 이 글을 올려본다
우리가 못하면 우리의 후손들 이라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펌)
대마도-한국영토 거론이 두려운 일본
일본이 또 다시 독도 시비를 걸고 있다.
일본도 독도는 역사적으로 신라때 이사부 장군이 점령접수했고,
일본 메이지(明治)때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에서도
일본영토가 아님을 인정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저들이 왜 이렇듯 시비를 멈추지 않을까!
이유가 있다.
대마도(對馬島)-한국영토 거론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작전이다.
'對馬島本是我國之地'(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다.)
이는 세종대왕이 선언한 것을 실록이 기록하고있는 글귀다.
대마도(對馬島)는 명백히 우리영토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50km,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138km이다.
이 대마도에 고대부터 한국인이 건너가 살았다.
(魏志) 고대 馬韓(마한)과 마주보는 땅이라 하여 우리 선조는「對馬島」로 명명하였다.
세종대왕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의 왜구를 토벌하고 확실하게 한국령(경상도)에 예속시켰다....
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
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이 글귀는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 있는 글귀다.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고 우리 민족의 한쪽다리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그 對馬島를 자기들 멋대로 자기영토로 편입 시켜버렸다.
우리는 일본이 잘라간 그 한쪽발(嶺南之趾)을 되찾아야 한다.
일본은 임진왜란→스페인, 영국 등 서구근대와 세력의 해양영토 약탈시기→식민지 시기 등 연이은
불행한 소용돌이를 이용해 대마도를 슬그머니 도둑질 한 후 (1871년에 일방적으로 이스하라현으로 그 후 1876년에는 나가시키현에 편입)아예
자기들 영토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조정(한국)은 어떤 형태가 되었던 일본에 대마도를 넘겨준 일이 없다.
도둑질한 대마도를 두고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한국인뿐 아니라 그들(후손) 자신도 세뇌했다.
우리는 그 쇠뇌작전과 특히 조작된 일제 식민사관에 젖어 지금까지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건국)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불과 사흘 후(8월 18일) 「역사의 진실은 어쩔 수 없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므로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천명했다.
6.25직전(3년 동안)까지 60여차례나 요구했다.
일본은 역사학회•고고학회 등으로 하여금 대마도에 관하여 왜곡-논문을 발표케 하면서 변명했다.
「쓰시마의 역사적 위치(1949)」,
「대마 문제(1951)」 논문 등이 그 예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미•소가 대립하자 일본은 「이때다」하고 미국에 읍소로비를 했고 미국은 마침내 한국을 배제한채 일본과 다음과 같이 전후(戰後)처리 (샌프란시스코협정)를 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도서는 한국에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에서 미국은 독도와 대마도에 대해서는 영토속국을 명백히 하지 않은 것이다.
아! 6.25가 대마도 반환 걸림돌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고 우선 평화선 선포를 통해 우선 독도만은 어족(魚族)보호 명분을 들어 독도만은 실효지배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지난 2005년에 확인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이승만은 대마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치,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여기에서 「specifically renounce」귀절에 주시해야 한다.
이는 외교문서로서는 최고로 강력한 의사표시다.
대마도 회복(반환) 문제는 우리 7,000만 민족의 숙제다.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회복하는 문제에 있어 국제관례의 관점에서 아무런 제약이 없다.
왜냐하면 1862년에 미국의 영토가 된 일본 남부 오가사와라(小笠原) 군도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일본 영토로서 인정받고 반환 받았던 국제적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내놓은 지도 ‘삼국접양지도’(하야시시헤이
(林子平) 제작, 프랑스어판)가 그 근거이다.
미국이 오가사와라 군도가 일본 영토임이 옳다고 판단하게 한 그 지도에 오가사와라가 일본 영토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엄연히 한국 영토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이에 준하는 증거가 또 발굴되었다.
지리학자로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이태리인
J.H.Kernot씨가 1790년에 작성한 「일본과 한국」이라는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뿐만 아니고 대마도도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는 사실이 발굴(견)된 것이다.
이 지도에는 대마도가“STRAIT OF COREA'로 표시되어 있고 특히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의 관할 국가를 표시하는 지도 바탕 색깔을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으로 나타내 이들 섬이 한국령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일련의 사실이 부각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독도 시비를 계속하며 분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속셈이 가증스럽다.
독도시비에 말려들고 「對馬島本是我國之地」 세종대왕이 선언한 이 확실한 증거를 두고도 우리는 대마도는 일본 땅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약소국이 아니다.
적어도 자기것은 자기것이라고 당당하게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권에선 나 몰라라 하는 형국이니,
우리 네티즌 들이라도 이글을 여러 카페로 올려 여론을 형성하고,
독도를 떠나서 대마도 반환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게하는 초석이 되고자 이 글을 올려본다
우리가 못하면 우리의 후손들 이라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펌)
06 August, 2014
고조선 (단군조선:진한) 왕계보
(3) 단군조선 왕계보 (진한)
단군(檀君),천자(天子),천왕(天王),천제(天帝)
47대 2096년(BC2333 ∼ BC238)
작성순서
[대 왕명 (즉위년도) 재위기간
약사]
1 왕검(王儉)(BC2333) 93
단웅과 웅씨녀사이에서 태어남. 신인 왕검이 무진년(b.c.2333) 오가와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局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러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니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다.
2 부루(扶婁)(BC2240) 58
BC2239 소련 대련 3년상.경술 10년(B.C.2229),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듬.무술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3 가륵(嘉勒)(BC2182) 45
일명 읍루. 삼랑 을보록이 정음38자(가림토 문자)제작.신축 3년(B.C.2180), 신지인 고을이 배달유기를 편수
4 오사구(烏斯丘)(BC2137)
38 산삼발견.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 을 몽골리한(한은 임금의 뜻)으로 봉하다.
5 구을(丘乙)(BC2099) 16
양가(羊加)구을이 즉위.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듬
6 달문(達門)(BC2083) 36
우가(牛加)인 달문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이음 .육십갑자 사용(BC2096)
7 한율(翰栗)(BC2047) 54 양가(羊加)인 한율이 즉위.
8 우서한(于西翰)(BC1993) 8
우가인 서한 즉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였다.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9 아술(阿述)(BC1985) 35
양가(羊加).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10 노을(魯乙)(BC1950) 59
우가인 노을이 즉위. 신원목(신문고와 같은 역할)설치(BC1946)병오 16년(B.C.1935), 돔눔밖 십리의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중국에선 황하 또는 발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팡괴가그려져 있어 이것이 팔괘의 시초라 하고 삼서성의낙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 이를 하도 낙서라 하는 것이다.)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윳판과 같은 것이었다.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감성(천문대)을 두었다.
11 도해(道奚)(BC1891) 57
우가(牛加).경인 원년(B.C.1891), 단제 께서는 오가에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정사 28년 장소를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정묘 38년 백성들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12 아한(阿漢)(BC1834) 52
우가 아한이 즉위.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리라.
13 흘달(屹達)(BC1782) 61
우가 흘달이 즉위.대음달. 하 정벌. 무술50년(B.C.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심었다. 미혼의 자재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14 고불(古弗)(BC1721) 60
우가인 고불이 즉위.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을해 56년(B.C.1666),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1억 8천만인 이였다.
15 대음(代音)(BC1661) 51
후음달.경진 원년(B.C.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침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16 위나(尉那)(BC1610) 58
우가인 위나가 즉위.
17 여을(余乙)(BC1552) 68
병신 20년(B.C.1456), 지백특사람이 와서 특산물을바쳤다.
18 동엄(冬奄)(BC1484) 49
19 구모소(구牟蘇)(BC1435) 55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지었다.
20 고홀(固忽)(BC1380) 43
우가인 고흘이 즉위.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21 소태(蘇台)(BC1337) 52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영지등의 나라를침공하엿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조공을 바쳤다.우현왕은 주변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 께서는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중국 서울 북평의 옛이름)의 자손 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발해만이나 요동만)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았다.
22 색불루(索弗婁)(BC1285) 48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 무력으로 제위에 오름.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엄독골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여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신미 36년 변방의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23 아홀(阿忽)(BC1237) 76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여섯읍을 설치함.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접근하지 못하였다.
24 연나(延那)(BC1161) 11 태자 연나가 즉위하여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25 솔나(率那)(BC1150) 88
영나의 아우.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26 추로(鄒魯)(BC1062) 65 태자 추로가 즉위
27 두밀(豆密)(BC997) 26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8 해모(奚牟)(BC971) 28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29 마휴(摩休)(BC943) 34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30 내휴(奈休)(BC909) 35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31 등올(登올)(BC874) 25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32 추밀(鄒密)(BC849) 30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33 감물(甘勿)(BC819) 24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34 오루문(奧婁門)(BC795) 23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35 사벌(沙伐)(BC772) 68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임진 24년 큰비가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36 매륵(買勒)(BC704) 58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무신 32년 서촌의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낳았다.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일본 서기는 이사람을 神武王(신무왕)이라며 건국시조로 날조하여 떠받들고 있다.]을 보내어 바다의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37 마물(麻勿)(BC646) 56
38 다물(多勿)(BC590) 45
39 두홀(豆忽)(BC545) 36
40 달음(達音)(BC509) 18
41 음차(音次)(BC491) 20
42 을우지(乙于支)(BC471) 10
43 물리(勿理)(BC461) 36
을묘 36년 우화충이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백민성 욕살 구물이 장당경을 점령하니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 구물(丘勿)(BC425) 29
병진 원년(BC 425) 3월 우화충을 죽임.백민성의 욕살구믈 즉위. 국호를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45 여루(余婁)(BC396) 55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신축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46 보을(普乙)(BC341) 46
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고열가가 43대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 고열가(高列加)(BC295) 57
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했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2,096년이라 임술57년고열가 단제께서 조선 폐관하시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었다.
조선폐관 (BC238)
대한민국 (환국) 국가 계보도
13 July, 2014
안중근 어머니께서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편지
안중근 어머니께서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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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전상서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법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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