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연횡 (合縱連橫 합할 합, 세로 종, 이을 련, 가로 횡)
전국시대 중반(B.C 300년대 초반) 전국칠웅이 자리를 잡으며 패권을 다퉜다. 이 과정에서 상앙변법을 통해 강국으로 부상한 진나라 혜문왕이 각 제후국에 땅을 요구하며 동진을 추진해 독보적으로 나선다. 이때 주나라에 귀곡선생의 수제자 중 소진과 장의 두 희대의 유세가가 나왔는데, 먼저 소진은 자신의 유세술을 펼치기 위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국을 돌아다녔다.
처음엔 주나라 현왕을 알현하고 진혜문왕에게는 아버지 효공 때 상앙 같은 유세가의 무소불위를 봤기에 무시당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귀곡선생이 준 태공음부편(太公陰符篇)을 절차탁마해 유세술에 눈을 뜨고는 조나라 숙후를 찾아갔으나 정승 봉양군에게 퇴자 맞고, 다시 연나라 문공에게 의탁하여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이후 조나라 숙후를 다시 찾아가 6국이 연합해서 진(秦)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책을 내놓으며 각국을 돌아다니며 연합시켰다. 그때 그의 권세는 6국의 재상을 지낼 만큼 주나라의 왕권을 능가했다. 아뭏든 합종책이 진을 견제하며 빛을 보는가 했는데, 이때 소진과 동문수학했던 장의도 출사해서 유세술을 펼치려고 위나라 혜왕을 찾아갔다가 퇴자 맞고 초나라 위왕에게 의탁하다가 영윤 소양에게서 화씨벽을 훔친 주범으로 오해받아 치도곤을 맞았다. 하지만 입만은 살아서 다행이라며 부인에게 자랑을 했다한다.
이후 조나라에 있던 친구 소진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으려다 겉으로는 문전박대를 당했으나, 소진의 숨은 배려로 진(秦)혜문왕이 장의를 알아보고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으로 올랐다.
진(秦)혜문왕에게 인정받은 능력은 6국을 이간질시켜 띄어 놓아 진나라에 속국으로 붙게 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는 소진이 제시한 합종책을 깨기 위해 첫 번째로 위나라와 연나라를 포섭(연나라 세자와 결혼)해서 진나라를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꾀어 위나라에서도 재상직을 하여 진나라와 겸직한다. 이때부터 합종의 6국은 와해되기 시작되고 소진은 장의의 꾀로 진나라에 붙은 연나라를 책망하러 갔다가 도리어 연나라 왕에게 그러면 제나라가 우릴 침범한 일은 어쩌겠냐며 책망 받는다. 이에 소진은 연역왕의 어머니 문부인과 사통해 일부러 죄를 짓고 제나라로 도망가서 제선왕을 보필하며 눌러 지낸다.
이로써 소진은 장의의 연횡책에 위기감을 느껴 위, 조, 한, 초, 연 5개국 합종을 추진해 초회왕이 맹주로 추대되어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다들 동상이몽인지라 함곡관에서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서 제나라가 빠졌는데 그 이유는 선왕에 뒤를 이은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의 언질로 일부러 늦게 합류해 합종 대열에서 한발자국 빼었기 때문이다.
제나라는 안정감을 찾게 되고 제선왕 시절 잘나가던 소진의 세력은 꺾이며, 제민왕이 맹상군을 더욱더 중용하니, 합종의 실의 없음과 무용함을 들어 소진을 궁지로 내몰아 대부들이 자객을 시켜 암살시켰다. 이렇게 소진은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출분했다가 최후의 말로를 맞은 것이다. 한편 위나라 정승으로 있던 장의는 육국이 진나라를 치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소진까지 죽자 더욱더 의기양양해 위 애왕을 설파해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게 하고 다시 진나라로 복귀한다. 이때 연나라는 공자 자지(子之)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것을 제민왕이 평정하며 위세를 떨치자 종묘사직이 거들 나버린 연나라는 연소왕이 권좌에 올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여기서 악의가 등장한다.
한편 합종이 사라진 종국에는 초, 제, 진 삼국이 강국으로 부상되며 서로 암중모색했다.
여기서 장의가 또다시 나서서 제나라와 두터운 친교를 맺었던 초나라 회왕을 두 번이나 속여서 제나라와 절교하면 진나라의 땅을 떼어주겠다는 장의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분통해하고 장의를 잡았다가 다시 풀어줬다.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서 두 나라를 이간질 시켜 초와 진이 통혼관계(회왕과 혜문왕이 서로의 딸을 시집보냄)를 맺어 동맹을 하게한다. 하지만 이때 제민왕이 그 사이 회왕이 진과 붙었다고 화가나서 회왕을 치니 그는 겁을 먹고 세자 횡(초경양왕)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내어 화친했다.
이에 이번에는 진소양 왕이 분통해하며 초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초회왕을 사로잡기 위해서 빼앗은 땅을 돌려준다고 꼬여 대장 백기와 몽오를 출전시켜 진나라 함양 땅으로 오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초나라 대신 굴원과 소저는 극구 만류했지만 가야된다는 근상과 공자 난을 데리고 적지로 들어가 함양 땅에서 볼모로 잡히게 되었다. 이때 초나라에서는 왕위가 비었다 해서 곧바로 제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는 세자횡을 데려와 앉히니 그가 바로 초의 경양왕이다.
초회왕은 이렇게 제와 진에 굴욕을 당하며 볼모생활 중 도망치다 다시 잡혀와 분통해하며 피를 한말이나 쏟고 죽었는데, 이는 예전의 춘추말 진(晉)과 초가 동맹하던 시기에 두 곳에 붙으려던 정나라의 정간공과 같은 형세다. 이렇게 초회 왕이 죽게 되자 제와 동맹해서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였던 충신인 대부 굴원은 진나라의 장의와 내통한 초경양 왕의 근신이던 정적 공자 난과, 간신 근상과, 왕의 애첩 때문에 삭탈관직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종묘사직을 달래다, 초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조정에는 간신들만 득세하는 상황을 한탄하고 슬퍼하다가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그가 바로 초나라의 대신이자 애국시인으로 이름난 굴평이고 자는 원으로 회왕과 경양왕 2대에 결처 봉직하면서 주로 회왕을 섬겨 좌도(左徒)의 중책을 맡아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했으며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서 시경(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2대 시가집이라고 하는 초사(楚辭)의 저자다. 이런 그의 충절을 기려 후세에 5월 5일 멱라수에는 경도희(競渡戱 :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주, 누가 굴원의 시체를 빨리 건져오나 내기하는 의미)라는 행사와 제사를 지낸다.
‘사당은 강가에 우뚝 섰는데 충렬왕에게 바치는 향불이 그칠 때가 없더라. 그 후 간신들의 뼈는 어디서 썩었는지 모르지만 백성들은 해마다 그날이 되면 배를 타고 충신을 조상하는 도다.’
이렇게 장의의 세치 혀는 얼빠진 초회왕을 갖고 놀고 충신까지 죽이며 초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합종의 소진보다 더 간교하고 뛰어나서 진나라를 중심으로 6국이 때에 따라 동맹관계를 맺게 해서, 지난날 소진이 이루었던 육국의 합종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후에 연횡정책의 중심에 서 있던 진혜문왕이 죽고 세자 탕이 계승하니 그가 바로 진무왕으로 이 왕은 용사 임비와 맹분을 데리고 주나라에 가서 용력을 자랑하려고 구룡신정을 드는 차력시범을 보이다가 놓쳐서 발목이 찍혀 병사했다.
진무왕이 그렇게 죽기 전 권세와 대신들의 반발의 위협을 느낀 장의는 스스로 실각함을 비치며, 때 마침 제민왕 침입의 눈을 돌린다며 위나라 애왕에게 출분해 정승으로 지내다 1년 뒤 병사하여, 소진의 최후와는 비교된다. 종국엔 장의의 연횡책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진을 중심으로 했기에, 합종보다 더 현실적이며 안정성과 효율성을 지녀서 후에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합종연횡(合縱連橫) 주나라 소진은 강국인 진나라를 대하여 약소국인 6개국이 연합하는 ‘합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장의는 현실적으로 약소국은 진나라 밑에 들어가야 살 수 있다는 속국론인 ‘연횡’을 주장했다.
* 합종책 : 전국시대,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6국 동맹책.
연횡책 : 6국이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하는 정책.
귀곡자 : 전국시대의 모사로 종횡가(縱橫家)를 이뤘다 하나 성명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제반 지식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가 숨어살던 귀곡(산서성 내)이란 지명을 따서 호를 삼고 종횡설의 법(法)을 적은 귀곡자(鬼谷子) 3권을 지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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